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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례여행4] 설계계약이 해지된 경우 설계비 중 상당 부분을 지급한 건축주는 설계도를

등록일: 2022-06-13 조회: 4
(건설기술진흥법 판례여행 네 번째 사례)

설계계약이 해지된 경우 설계비 중 상당 부분을 지급한 건축주는 설계도를 계속 이용할 수 있을까?

정유철, 한수연, 강선주 법무법인(유)율촌 변호사

건설에서는 시간이 돈이다.

그러다 보니, 사업이 시작되면 완공 때까지 숨가쁘게 달릴 수밖에 없다. 초반 작업인 설계 작업도 이런 바쁜 흐름 속에서 앞뒤 볼 여유 없이 진행되곤 한다.

그러나 분쟁의 씨앗이 되는 곳이 또 설계다 보니, 설계도면을 넘겨준 순간부터, 건축주와 시공사로부터 온갖 확인과 요구를 받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설계잔금의 지급을 두고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다툼이 오가는 동안에도 설계도를 바탕으로 시공은 계속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설계계약이 해지되는 경우, 건축주로서는 ① 상당한 비용과 노력이 드는 새로운 설계를 하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② 설계계약의 해지에도 불구하고 기존 설계도를 사용할 수 있는지가 문제된다.

이 사건에서 설계사는 아파트의 신축공사에 필요한 설계도서를 작성하여 건축주에게 교부하였다. 건축주는 설계도서에 따라 현재 지하층의 공사를 마치고, 골조공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설계사에게 설계용역에 대한 보수로 총 454,594,000원 중 258,350,000원을 지급하였다.

이후 설계사와 건축주 사이에 설계도면에 하자가 있는지 여부와 설계용역의 보수지급을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하였다. 건축주는 1999. 1. 28. 설계사의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계약을 해제한다고 통보하였다.
이에 대해 설계사도 1999. 2. 10.경 건축주와의 건축설계계약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설계용역에 관한 보수의 정산을 요구하였다. 결국 건축설계계약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와 함께 설계사는 건축주에게 설계계약이 해지되었으므로 더 이상 설계도를 사용하지 말라는 가처분을 제기하였다.

대법원은, ‘가분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진 건축설계계약에 있어서 설계도서 등이 완성되어 건축주에게 교부되고 그에 따라 설계비 중 상당 부분이 지급되었으며 그 설계도서 등에 따른 건축공사가 상당한 정도로 진척되어 이를 중단할 경우 중대한 사회적ㆍ경제적 손실을 초래하게 되고 완성된 부분이 건축주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에는 설계사와 건축주 사이에 건축설계계약관계가 해소되더라도 일단 건축주에게 허여된 설계도서 등에 관한 이용권은 의연 건축주에게 유보된다’고 판단하였다(대법원 2000. 6. 13.자 99마7466 결정).

설계계약이 해소된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따져보아야 하는 문제다. 그러나 설계계약에 따라 상당부분 시공이 되었고, 설계비의 55%가량인 2억 5천여만 원이 지급되었다면, 과연 설계도서에 대한 건축주의 이용권을 박탈시켜 더 이상 설계도서에 따른 잔여 공사를 못하게 하여야 할까? 더 나아가 기존에 지은 부분도 설계자의 지적재산권을 무단 이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까?

대법원은 이에 대해 위와 같은 조건들이 갖추어지고, 완성된 부분이 건축주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에는 설령 설계계약 관계가 해소되더라도 건축주는 설계도를 계속 이용할 권리를 가진다고 판단한 것이다.
건축주가 45%에 이르는 잔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음을 이유로 설계계약을 해지하고, 그 설계도면의 사용까지 중단하게 하여 달라며 가처분을 신청한 설계사의 억울함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대법원은 55%의 대금을 이미 지불하였고, 시공도 상당 부분 진행되었으므로, 설령 건축주의 잘못으로 설계계약이 해지되더라도 건축주의 설계도면 사용을 금지시키는 가처분 신청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판결 이유에도 명확히 나오지만 이미 건축물이 상당 부분 시공된 이상 그 상태는 존중하라는 취지이다. 이런 대법원의 입장은 건설과 관련된 대부분의 판례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그러면 일은 다하고 돈은 반도 못 받은 설계사는 아무 방법도 없이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을까?

대법원은 이미 상당 부분 지어진 건축물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건축주로 하여금 설계도면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저작권침해금지가처분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다. 따라서 설계사는 원래 설계계약의 취지대로 남은 잔금의 지급을 구하는 소송을 하면 된다.

앞선 판결들에서 본 것처럼 설계계약은 기본적으로 ‘도급’의 성격을 가진다. 이미 설계를 완성하였고, 그 설계가 무용하지도 않은 이상, 일부 설계하자가 존재한다면 그에 관한 부분을 공제하고 남은 설계대금은 모두 지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대법원의 취지대로 건축주가 기존 설계도면에 따라 이미 건축물을 상당 부분 지었고, 또 짓고 있다면 이런 점은 설계가 무용하지 않다는 것이므로 설계도면에 대한 대가로서의 잔금을 받을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설계사가 설계도면을 돌려받아서 그것으로 다른 곳에 시공을 하려는 특수한 사정이 없는 이상, 설계계약과 관련된 분쟁은 가처분이 아닌 대금 청구 소송 등 본안 소송으로 하여야 한다.
다만 건축주가 처음부터 돈도 거의 주지 않으면서 괜히 설계 하자를 트집잡아 아예 설계대금을 안 주려는 나쁜 심보가 있는 경우에는 대법원이 말하는 ‘설계비 중 상당 부분이 지급’된 경우가 아니므로 가처분을 신청하여 설계도를 이용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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