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기술진흥법 판례여행 세 번째 사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실시설계의 완성, 온전히 대금을 받을 수 있을까?
정유철, 한수연, 강선주 법무법인(유)율촌 변호사
건축설계계약의 업무 내용으로 흔히 기본설계와 실시설계를 뽑을 수 있다. 대략적으로 기본설계는 건축허가 등을 위해, 실시설계는 착공을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설계계약을 체결하고 기본설계까지 마친 후 사업이 원활히 추진되지 않아 실시설계를 진행해야 할 지가 불확실한 순간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발주자 측에서 실시설계를 중단해 달라는 명확한 의사를 표시하면 좋을 텐데, 발주자 스스로도 사업이 진행될 지 여부가 불분명하다 보니, 괜히 실시설계를 중단하라고 하였다가 사업이 급속히 재추진되면 실시설계가 늦어질까 염려되고, 또 무조건 진행을 하라고 하기에는 사업이 중단되면 실시설계가 무용할 수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럴 때, 설계사는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까?
재빨리 인력을 추가 투입하여 실시설계를 조기에 완료하고 그에 대한 대금을 청구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답도 없는 발주자의 선택을 기다리며 그대로 있는 것이 나을까?
이 사건에서, 발주자가 계획한 오피스텔 신축공사는 1989. 3.경부터 발주자와 A건설 사이에서, 발주자가 대지를 제공하고 A건설이 설계에서부터 건축허가, 시공 및 분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을 지고 공사를 완료한 후 그 분양대금에서 설계비, 공사비를 충당하는 이른바 "턴키 베이스" 방식을 전제로 추진되었다.
설계사는 A건설의 주선에 의하여 위 건축공사의 설계를 의뢰받기로 하였다. 설계사는 A건설에 건축계획안을 미리 작성하여 주는 등 위 건축도급공사의 사업성 검토에 참여하면서 발주자와 설계에 관한 협의를 계속하였다.
설계사는 발주자에게 오피스텔 건축에 대하여 정부의 규제강화가 예상되어 서울시에 오피스텔 건축계획심의가 많이 들어오고 있으니 빨리 심의신청을 하여 건축허가라도 미리 받아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발주자는 건축허가를 미리 받기 위해, A건설과 정식으로 공사도급계약을 체결하기도 전에, 공사도급계약이 체결되게 되면 A건설로부터 설계비를 지급받아 계산해 주겠다고 말하며 설계사와 설계계약을 먼저 체결하였다.
그러나 1989. 7. 중순경 A건설측에서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공사도급계약 체결을 거절하였다. 설계사도 발주자와 A건설부터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들어 알게 되었고, 발주자에게는 A건설을 잘 설득해서 공사도급계약을 체결하도록 노력해보겠다고까지 말하였으나, A건설은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발주자는 그 후에 다른 시공사를 찾아 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오피스텔 신축계획은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하였다.
한편 위 오피스텔 신축공사는 발주자 소유의 867.4평방미터 외에 C 소유의 531.6평방미터 등 2필지 대지상에 건축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계획되어 왔으나 C소유 토지가 위 오피스텔 건축대지로 제공될 수 있는지 여부가 불확실하였고, 설계사 역시 발주자 등에게 설계업무 수행에 필요한 측량도나 지질조사서 등 자료의 제출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이런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이후 수 차례에 걸친 설계사의 자료 제출 요청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사정들을 이유로 발주자가 이에 응하지 않는 등 설계에 관한 협조가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설계사는 오피스텔에 대한 건축계획심의가 조건부통과된 후 다음단계의 실시설계에 착수하여 설계를 진행하면서 위와 같은 사정에 아랑곳 하지 않고 설계업무의 실시를 강행하여 1989. 8. 29. 완성한 설계도면을 발주자에게 납품하였으나 발주자는 대금을 주지 않았다.
결국 설계사는 실시설계 대금을 발주자로부터 받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였다.
대법원은, ‘발주자가 건설회사와 신축공사도급 및 분양위임계약을 체결함에 따라 설계비부담을 면할 수 있다는 사정을 기초로 설계자와 설계계약을 체결하였는데 그 후 건설회사와의 공사도급계약의 체결이 확정적으로 결렬되었고 건축부지 중 타인소유부분의 건축부지 제공이 불분명한 사정을 설계자가 알게 된 이상, 설계자로서는 발주자와의 협의로 설계의 속행 여부를 결정하여야 한다’고 판시하였다(대법원 1993. 9. 24. 선고 93다33272 판결).
그럼에도 설계를 강행한 경우 설계보수 전액을 발주자에게 지급책임을 지우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이나 형평의 원칙에 비추어 불합리하므로 위와 같은 여러 사정을 참작하여 계약대금을 30퍼센트 정도 감액한 조치는 정당하다고도 판단하였다.
설계사가 계약에 따라 설계를 하면 되지 이렇게 발주자와 상의할 의무까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이런 것이 모두 계약과 관련된 민사법의 대원칙인 신의성실의 원칙에서 나오게 된다. 대법원 역시 이 사건을 통해 이러한 점을 인정하고 있다.
설계사가 발주자와 협의하여 설계를 진행해야 할 사정이 발생하였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설계를 강행하여 완성하는 경우, 신의성실의 원칙에 비추어 설계대금이 감액될 수 있으니 미리미리 발주자와 상의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