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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례여행2] 설계잔금은 건축허가를 조건으로 지급되는 것일까?

등록일: 2022-05-16 조회: 4
(건설기술진흥법 판례여행 두 번째 사례)

설계잔금은 건축허가를 조건으로 지급되는 것일까?

정유철, 한수연, 강선주 법무법인(유)율촌 변호사

건축설계와 관련하여 현실에서 가장 문제되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설계대금 내지 잔금의 ‘온전한’ 지급일 것이다.

설계에 전혀 문제가 없더라도, 처음 계획과 달리 착공이 지연되거나 사업계획이 미루어지는 경우 설계잔금의 지급이 늦어지거나 감액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업계획이 변경되거나 무산되는 경우에는 설계가 소용없어졌다는 이유로 설계잔금을 대폭 감액하거나 전혀 지급하지 않는 경우까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모든 설계를 마친 건설기술인의 입장에서는 피땀을 쏟아 만든 결과물에 대해 아무 잘못 없이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니 정말 억울할 일이다.

소개할 판례는 바로, 이러한 ‘설계’의 법률적 의미와 그에 따른 대금 지급의 해석에 관한 대법원 판결이다.

이 사건에서, 시행사는 백화점을 신축하기 위해 A사를 설립하고, 1990. 11. 21. 설계사와 기본설계도면과 실시설계도면을 작성하기로 하는 설계계약을 체결하였는데, 특약으로 잔금은 공사착공시 지불하되, 공사착공이 건축허가일로부터 6개월을 초과하면 허가일로부터 6개월 내에 지불하기로 하였다.

설계사가 위 설계도면을 모두 완성하였음에도, A사는 행정청이 부과한 ‘주변도시계획도로 중 중앙로의 현재 폭 35m를 폭 50m로, 사업지 서측 접근로의 현재 폭 12m를 폭 20m로 확장’하라는 조건을 이행하지 않아 1994. 4. 22. 건축허가신청이 반려되었다.

A사는 위 건축허가신청반려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대법원에서 패소확정되었고, 이후 아직까지도 위 건물의 착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A사는 특약상 ‘공사착공’ 내지 ‘건축허가’가 잔금 지급 조건인데 조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설계사에게 잔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결국 설계사는 위 설계계약에 기한 설계잔금 지급 소송을 제기하였다.

우선, 법학에서는, 어떤 ‘계약’이라는 것을 분석할 때, 민법 등에 기재되어 있는 ‘매매’, ‘증여’, ‘도급’, ‘위임’ 등과 같은 계약들 즉 이름하여 ‘전형계약’(典型계약)이라고 하는 것을 기초로 현재 문제되고 있는 계약의 성질이 무엇인지를 규정짓곤 한다.

예를 들어, 제작물공급계약이라고 하면, 어떤 특정한 물건을 만들어서 납품하는 것이니까, ‘특정한 물건’을 만든다는 의미에서는 공사와 같은 ‘도급’적 성질이 있고, ‘납품’을 한다는 의미에서는 ‘매매’의 성질이 있으니, 제작물공급계약은 도급과 매매 2가지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개념화하게 된다.

그런데, 도급과 매매에 관한 민법의 규정들은 서로 달라, 완벽히 혼용되어 사용되기는 어려워, 어떤 순간에는 도급의 규정과 매매의 규정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실무적인 입장에서는 반드시 어느 하나의 전형계약을 따르거나 한 전형계약의 규정을 완전히 가져온다기보다는 해당 계약이 가지는 특성과 해당 사건에서 발현되는 계약의 내용을 고려하여 각각의 경우에 다른 해석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럼, 우리가 매일 같이 접하는 이 ‘설계계약’이란 도대체 어떤 성질의 것일까? 설계도면을 완성하여 주면 끝나는 ‘도급’과 같은 성질의 것일까, 아니면 상대방이 목적하고 있는 시공의 완료까지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위임’과 같은 성질의 것일까?

만약 완전히 도급의 성질을 가진다고 한다면, (다른 조건이 이루어질 필요 없이) 설계도면의 완성으로 잔금을 지급받을 수 있지만, 완전히 위임의 성질을 가진다면 계약한 시점까지 끝까지 설계 관련 업무를 수행하여야지만 잔금을 모두 지급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의 1심은 ‘설계계약은 도급계약이다, 그러니 설계도면을 모두 작성하여 상대방에게 교부하면 일의 완성을 다한 것이 되어 설계비를 청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서울지방법원 1997. 11. 4. 선고 96가합51474 판결).

다만, 사적자치의 원칙상 당사자 사이에 특별한 약정으로 설계비의 지급 시기를 정할 수 있어, 이 사건에서는 착공시 또는 착공이 건축허가일로부터 6개월을 초과할 때에는 허가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지급하기로 특별히 약정하였으나, “건축허가”가 나지 않을 것으로 확정된 경우에는, “건축허가”라는 전제는 더 이상 성립될 수 없다. 이런 경우에는 건축허가가 난 것과 동일하게 보아서, 결국 건축허가신청을 반려한 1994. 4. 22.로부터 6개월이 지난 1994. 10. 22. 이행기가 도래하게 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2심에서도 ‘설계사는 이 사건 설계계약에 의한 설계도면을 모두 완성하여 시행사에게 인도함으로써 일응 계약상의 의무를 전부 이행한 것’이라고 판단하였고(서울고등법원 1998. 4. 22. 선고 97나55883 판결), 대법원 2심의 결론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건축허가’ 등은 조건이 아니라고 판시하였다(대법원 1999. 7. 27. 선고 98다23447 판결).

따라서, 기본적으로 설계계약은 민법상 “도급”으로, 설계도면을 완성하여 인도하면 계약상 의무를 모두 이행한 것이어서, 상대방에게 설계비 내지 잔금을 청구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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